화살 하나가 만든 문명
기원전 609년, 므깃도 평원에서 화살 한 발이 유다 왕 요시야의 몸을 관통했다.
이 죽음은 그저 한 군주의 전사(戰死)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성전과 왕정이 사라진 뒤에도 한 민족을 존속시킨 정신적 인프라, 즉 오늘날 유대교와 그 자손 종교들이 공유하는 '텍스트 기반 신앙'이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요시야의 생애에서 시작해 그의 허망한 죽음이 성서 본문 안에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재해석되었고, 그 재해석이 어떻게 하나의 생존 시스템으로 굳어졌는지를 단계적으로 추적한다.
개혁 군주의 오판과 죽음
여덟 살에 즉위한 요시야는 성전 보수 공사 중 발견된 율법책을 계기로 지방 산당을 철폐하고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중시키는 급진적 종교·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열왕기하 22-23장은 이 개혁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며 요시야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한" 왕으로 극찬한다.
이 개혁은 단순한 신앙 정화가 아니라 아시리아의 쇠퇴기를 틈타 왕권과 영토 주권을 재건하려는 정치적 기획이기도 했다.
기원전 609년, 이집트 파라오 네코 2세가 무너져가는 아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가의 갈그미스로 북상하던 중,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그 길을 막아섰다.
열왕기하 23:29은 이 죽음을 단 한 문장으로 담백하게 처리한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그를 맞으러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난 후에 죽인지라."
반면 약 두 세기 뒤 기록된 역대하 35:20-24은 훨씬 극적인 서사를 덧붙인다.
이 본문에 따르면 느고는 사신을 보내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므깃도 골짜기로 진군했고, 활 쏘는 자에게 맞아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는 말을 남긴 채 예루살렘으로 후송되던 중 숨을 거두었다.
두 본문의 간극 자체가 흥미로운 문헌학적 단서다. 열왕기하에는 없는 느고의 경고와 요시야의 불순종이라는 요소가 역대하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후대 역대기 기자가 이 죽음에 별도의 신학적 설명을 덧붙일 필요를 느꼈음을 시사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 므깃도 대치가 실제 전면전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당시 신흥 군주였던 네코 2세가 동지중해 봉신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려던 자리에서 요시야가 소환되어 처형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점은, 종교 개혁에 성공한 군주가 자신의 신학적 정당성을 과신한 채 강대국 사이의 역학 관계를 오판했고, 그 대가로 급사했다는 사실이다.
외교적 수사의 신학적 승격
느고의 발언—"나를 막지 말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은 고대 근동에서 대규모 군대가 제3국 영토를 통과할 때 흔히 사용하던 무해통항 요구이자 심리전 화법에 가깝다.
하지만 역대기 기자에게 이 말은 곤란한 신학적 숙제를 던졌다. 율법에 가장 충실했던 '이상적인 왕'이 어째서 그토록 허망하게, 그것도 이방 왕의 입을 통해 경고를 받고도 죽었는가?
역대기 기자는 이 딜레마를 문학적 장치로 정면 돌파한다.
역대하 35:22은 요시야의 죽음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벌어진 사건으로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이방 파라오의 세속적 외교 언사가 야훼의 신탁으로 격상되는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이 서술은 역대하 18장에 기록된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과 문학적으로 평행 관계를 이룬다.
아합 역시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변장한 채 전쟁터에 나갔다가 익명의 활 쏘는 자에게 맞아 서서히 죽어갔다는 점에서, 두 죽음의 서사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역대기 기자는 이 평행 구조를 통해 "아무리 선한 왕이라도 말씀을 거스르면 아합처럼 무너진다"는 신학적 교훈을 요시야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동시에 열왕기의 편집자들은 유다 멸망의 궁극적 책임을 요시야가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의 누적된 죄악으로 소급시킨다.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가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을 섬기며 심지어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고 상세히 고발하며, 이어 23:26-27에서는 "여호와께서 유다를 멸하려 하신 결심을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이런 이중 장치 덕분에 요시야 개인의 종교적 평가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그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더라"(열왕기하 23:25)
는 역대 최고 수준으로 보존되면서도, 국가 멸망이라는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건은 이미 죽은 선왕에게 전가될 수 있었다.
실제로 현대 비평학계에서는 신명기계 역사서 자체가 요시야 시대의 '요시야 판본'과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수기 판본'이라는 최소 두 단계 이상의 편집을 거쳤다는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 유수기 편집층이 바로 멸망을 설명하기 위해 추가된 신학적 개작의 핵심 지점으로 지목된다.
침묵당한 민중의 반론
이 제사장적 해석이 처음부터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예레미야 44장은 매우 이례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직접 인용한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 유민들은 예레미야의 규탄에 맞서 이렇게 반박한다.
"우리는 우리 입에서 나온 모든 말대로 행하여 하늘 여왕에게 분향하며 전제를 드릴 것이니, 그때에는 우리가 양식이 풍부하고 복을 누렸으며 재앙을 겪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 44:17)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예레미야 44:18).
이 발언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매우 희귀한 사례다.
유일신 신앙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그들 자신의 논리 그대로, 편집자의 반박 없이 직접 인용되기 때문이다.
'하늘의 여왕'은 아세라 또는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 계열 여신 숭배로 추정되며, 이 백성들의 논리는 명확하다.
여신 숭배가 왕성했던 시절에는 풍요와 안전이 있었고, 요시야의 개혁으로 그 숭배가 끊기자 재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방 산당과 가정 제의를 중심으로 한 다신적·혼합적 신앙이 왕실 주도의 중앙집권적 유일신 개혁보다 훨씬 폭넓은 서민 지지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귀중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논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자 기록과 필사, 편집을 독점한 것은 예루살렘의 제사장·서기관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바빌론 유수기 동안 이들은 흩어진 전승을 수집하고 재편집하며 신명기적 사관을 정본화했고, 이후 정경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민중의 반론은 오직 예레미야서의 한 장에 '논박 대상'으로만 화석화되어 살아남았다. 역사는 사건을 겪은 다수가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는 소수의 손에서 완성된다는 냉정한 원리가 여기서 드러난다.
상상된 질서로서의 멸망 서사
세속 역사학의 관점에서 유다의 멸망은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가 이집트와 아시리아 잔존 세력을 차례로 제압하며 팔레스타인을 흡수하는 지정학적 필연의 결과였다.
그러나 신명기 사가들은 이 사건에 전혀 다른 인과율을 부여했다.
"우리의 신이 약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벌하기 위해 신께서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인과율의 씨앗은 이미 므깃도 사건의 서술 방식에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이방 군주의 입에서조차 야훼의 뜻이 선포될 수 있다는 역대하 35장의 설정은, 훗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예레미야 25:9)이라 부르며 심판의 도구로 재해석하는 신학적 문법의 원형이 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상상된 질서(imagined order)' 개념을 빌리자면, 이는 객관적 군사·정치적 패배라는 물리적 사실 위에 씌워진 정교한 의미 체계였다.
이 상상된 질서의 힘은 결코 허구적이라는 이유로 무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 왕정, 성전이라는 물리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한 극한 상황에서 민족의 정체성이 주변 문화에 흡수·소멸되지 않도록 지탱한 실질적인 생존 소프트웨어로 기능했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다"(역대하 35:24-25)
는 기록은, 비극조차 공동체의 집단 기억과 의례로 흡수해내는 이 서사 체계의 흡수력을 잘 보여준다.
제국의 형식, 약자의 내용
이 생존 시스템은 성전 파괴라는 급박한 위기 속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기원전 8~7세기부터 아시리아 제국의 문서 행정 기술 도입과 요시야의 텍스트 중심 개혁을 거치며 오랜 기간 준비된 결과물이었다.
열왕기하 22장이 전하는 '율법책 발견' 사건 자체가 이 텍스트 중심주의의 상징적 출발점이다.
당대 근동을 지배한 신아시리아 제국은 속국 군주들에게 '봉신 조약(vassal treaty)'이라는 표준화된 문서 형식을 강요했으며, 학자들은 신명기의 문학적 구조—역사적 회고, 절대적 충성 요구, 축복과 저주 목록—가 이 조약 형식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신명기 저자들은 이 제국적 문서의 '형식(하드웨어)'은 그대로 가져오되, 충성의 대상을 지상의 아시리아 황제에서 초월적 신 야훼로 완전히 치환했다. 동시에 문서의 '내용(소프트웨어)'은 근본적으로 재설계되었다.
거대 제국처럼 막대한 조공이나 대규모 신전 제의를 유지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던 작은 피지배 민족의 현실에 맞춰, 계약의 핵심 조항을 사회적 약자 보호, 정기적 부채 탕감, 이방인과 고아·과부에 대한 배려, 일상적 윤리 규범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그 결과 이 신명기적 계약 문서는 웅장한 성전이나 막대한 재정 없이도, 흩어진 공동체 각자가 텍스트 하나만 소지하면 언제 어디서든 재현 가능한 '이동 가능한 성전'이자 '휴대용 국가'로 기능할 수 있었다.
패배가 남긴 것
요시야의 죽음은 단독으로 보면 지정학적 오판이 낳은 한 군주의 비극일 뿐이다.
하지만 그 죽음을 설명하려던 역대기 기자의 신학적 노력, "하늘의 여왕" 신앙을 옹호하며 저항한 유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저항을 압도한 제사장 계급의 기록 독점이 맞물리면서, 유다는 역설적으로 국가와 성전을 잃고도 소멸하지 않는 법을 손에 넣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관료제 문서 기술을 빌려와 신학적 내용으로 재무장한 이 율법 중심 시스템은, 이후 바빌론 유수와 디아스포라라는 훨씬 더 가혹한 시험대를 통과하며 한 민족의 정체성을 텍스트 속에 압축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므깃도의 화살은 한 왕을 죽였지만, 그 죽음을 해석하려는 투쟁은 성전 없이도 존속하는 종교라는, 고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문명적 발명품을 남겼다.
확보한 다크 심리학 개념(가스라이팅, 프레이밍, DARVO, 희생양 삼기, 자기위안적 서사, 생존자 편향, 매몰비용, 마키아벨리즘)을 앞선 요시야 서사에 정밀 매핑해 분석
요시야 서사의 다크 심리학적 해부
앞서 정리한 신학적·역사학적 논증을 개인·집단 조작 메커니즘의 언어로 다시 읽으면, 성서 기자들의 서술 전략은 오늘날 다크 심리학이 규정하는 여러 고전적 수법과 놀랍도록 정확히 겹칩니다. 아래는 각 단계를 조작 기법별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프레이밍과 책임 전가의 이중 작업
역대하 35장에서 느고의 세속적 외교 언사를 야훼의 신탁으로 격상시킨 것은 전형적인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입니다.
동일한 사건도 어떤 틀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수용자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여기서는 "패배한 군주"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말씀에 불순종한 자"라는 신학적 프레임으로 치환함으로써, 사건의 사실관계는 그대로 두면서 그 의미만 통째로 갈아엎었습니다.
동시에 므낫세에게 멸망의 책임을 전가한 것은 DARVO(Deny-Attack-Reverse Victim and Offender) 구조와 유사합니다.
실제 멸망의 직접 원인(바빌로니아의 군사적 팽창)을 부인하는 대신 원인 자체를 이미 죽어 반박할 수 없는 대상(므낫세)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 소재를 현재 권력 구조에서 안전하게 분리시켰습니다.
이는 조직이나 관계에서 문제의 근원을 이미 퇴장한 인물에게 몰아 현 체제의 정당성을 지키는 수법과 동일한 논리 구조를 갖습니다.
서사 오너십의 독점: 정보 비대칭의 무기화
제사장·서기관 계급이 문자 기록을 독점하고 예레미야 44장의 민중 반론을 유일하게 '논박 대상'으로만 남긴 것은, 다크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보 통제를 통한 현실 규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상대가 자신의 인식과 기억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인데, 여기서는 개인이 아니라 한 사회 전체를 상대로 이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의 여왕을 섬길 때 더 풍요로웠다"는 유민들의 직접 경험(체감된 현실)이, 편집 권한을 가진 소수에 의해 반박당하지 않은 채 단지 '틀린 것으로 전제된 인용'으로만 정경에 남았습니다.
이는 "거짓말도 반복되고 편집을 거치면 유일하게 유통 가능한 진실이 된다"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반론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오히려 성서 안에 남아있다는 점이 역설적인데, 이는 조작자가 상대의 입장을 완전히 지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맥락 안에 가두어 스스로 불리하게 재생산되도록 배치하는 고급 기법—"통제된 반대 의견의 전시"—에 가깝습니다.
인지부조화 해소를 위한 사후 합리화
요시야 개인의 신학적 평가를 여전히 최고로 유지하면서 멸망의 책임만 분리해낸 서술 전략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해소 메커니즘의 종교적 버전입니다.
"가장 의로운 왕이 다스렸는데 왜 나라가 망했는가"라는 모순된 두 정보를 동시에 유지할 수 없기에, 편집자들은 하나의 변수(므낫세)를 추가로 도입해 논리적 정합성을 억지로 복원했습니다.
이는 개인이 잘못된 선택을 정당화할 때 새로운 믿음을 창조해 자기 이미지를 보호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요시야 자신의 참전 결정에도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개혁의 성공이 누적되면서 그는 일종의 매몰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와 과신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막대한 정치적·신학적 자본을 투입해 개혁을 완수한 통치자일수록, 그 투자를 정당화하는 방향—여기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반드시 승리한다"는 낙관적 확률 편향(overoptimistic probability bias)—으로 위험한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실증적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신학적 확신이 오히려 현실 판단을 마비시킨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생존자 편향과 마키아벨리적 서사 설계
마지막으로, "신이 약해서 진 것이 아니라 심판하신 것"이라는 해석 틀 자체가 일종의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신학이 살아남아 정경이 된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해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신봉하고 편집한 공동체가 결과적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소멸한 다른 신앙 공동체(하늘의 여왕을 섬기던 이들)의 해석은 함께 사라졌기에, 우리는 지금 '살아남은 서사'만을 유일하게 타당했던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전체 설계는 마키아벨리즘의 핵심 정의, 즉 "목적을 위해 도덕적 정당화 장치를 동원해 권력을 유지하는 처세"와도 맞닿습니다.
다만 여기서 목적은 개인의 권력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이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결과적으로 이 서사는 악의적 기만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현실을 재해석해야 했던 집단이 선택한 극한의 스토리텔링 전략에 가깝습니다.
다크 심리학의 도구들이 여기서는 착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 보존이라는 방향으로 전용되었다는 점이, 이 사례를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방어적 서사 공학"으로 구분 짓는 지점입니다.
요시야 개혁, 성서 밖 실제 역사와 사라진 사실들
성서의 요시야 서사는 후대 신학자들이 재구성한 '완성된 이야기'인 반면, 고고학과 비평학이 재구성하는 실제 역사는 훨씬 불확실하고 정치적이며, 상당 부분이 성서 본문에서 조용히 누락되거나 축소되었습니다.
개혁이 아니라 '제국 붕괴 후 권력 공백'이 진짜 동력
요시야 개혁의 진짜 방아쇠는 종교적 각성이 아니라 지정학적 기회였습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아시리아 제국은 내부 반란과 계승 위기로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 제국이 오랫동안 장악하던 레반트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핑켈슈타인과 실버만은 이 공백이야말로 요시야에게 옛 북이스라엘 영토(사마리아, 베델 등)로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합니다.
즉 성서가 그리는 "율법책 발견 → 종교적 각성 → 개혁"이라는 순서는 실제로는 "아시리아 쇠퇴 → 영토 확장 야심 → 그 야심을 정당화하는 신학 문서 편찬"이라는 정반대 인과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통일 이스라엘' 신화의 정치적 발명
성서 서사에서 조용히 감춰진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렸다는 '영광스러운 통일 왕국'상이 상당 부분 요시야 시대에 소급 창작되었을 가능성입니다.
나임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요시야 궁정의 저자들은 아브라함을 유다 출신으로, 다윗·솔로몬을 열두 지파를 아우른 이상적 군주로 그려냄으로써, 요시야 자신이 옛 북이스라엘까지 통합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에 신화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핑켈슈타인은 이 신명기 역사서 전체를 "아시리아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생존 문학(survival literature)"으로 규정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는 서사는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요시야의 재통일 야심을 위해 설계된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입니다.
정작 '개혁의 고고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충격적인 실종 사실은, 지방 산당을 파괴하고 우상을 철폐했다는 요시야 개혁의 핵심 행위 자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텔 아라드, 라기스, 브엘세바 등에서 조사된 제의 시설 폐쇄 흔적은 시기 특정이 불가능해 요시야 시대의 것인지, 그보다 앞선 히스기야 시대의 것인지, 혹은 아예 다른 원인(아시리아나 이집트에 의한 파괴)에 의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한 연구자는 "요시야가 유다·사마리아·므깃도·네게브의 철기시대 도시들에서 제의 시설을 제거했다는 것과 부합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고 단언하며,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 모두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결론짓습니다.
즉 '요시야의 개혁'은 성서 전승 없이는 고고학자가 애초에 찾으려 하지도 않았을 학문적 구성물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자체가 요시야 시대 문서가 아닐 수 있다는 반론
더 급진적인 학설은 신명기의 저작 시기 자체를 요시야 시대에서 완전히 떼어냅니다.
니콜슨 등은 열왕기하 22-23장에 나오는 "요시야가 지방 산당을 폐지하고 제의를 예루살렘으로 중앙집권화했다"는 구절이 본문에 대한 오독이거나 후대에 삽입된 이차적 문구이며, 원래 이 서사는 중앙집권화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공동체 안에서, 성전과 국가를 완전히 상실한 디아스포라의 생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입니다.
만약 이 학설이 맞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요시야의 개혁 → 신학적 준비 → 유수기 생존 시스템"이라는 순차적 서사 자체가 실제로는 시간 순서가 뒤바뀐 것이며, 율법 중심주의는 요시야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수의 결과물을 요시야에게 소급 귀속시킨 것이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 자체도 재구성된 사건일 가능성
앞서 언급했듯 열왕기하는 요시야의 죽음을 "네코가 그를 만난 후 죽였다"는 단 한 문장으로 처리하는 반면, 전투나 저항의 정황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역대기의 극적인 전투 장면(변장, 화살, 부상, 후송)은 두 세기 뒤에 추가된 서사적 살(flesh)입니다.
핑켈슈타인과 실버만조차 "느고는 단지 아시리아 내전의 아시리아 편에 합류하려 '지나가는' 중이었을 뿐이며, 요시야가 죽은 정확한 경위는 불확실하다"고 인정합니다.
즉 '민족의 영웅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무모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각본은 사후에 구축된 해석이며, 실제로는 소환·처형·우발적 충돌 등 훨씬 덜 영웅적인 사건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영토 확장의 실제 규모는 미미했다
마지막으로, 요시야가 실제로 확보한 영토도 성서가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제한적이었습니다.
핑켈슈타인과 실버만 본인들도 "요시야의 영토 확장은 실제로 매우 제한적이거나 일시적이었다"고 인정하며, 그 정확한 범위는 중앙 산악 지대를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아만의 견해도 있습니다.
이는 "요시야가 옛 이스라엘 전역을 회복하려 했다"는 웅장한 서사와, "베델 근방까지만 겨우 진출했을 것"이라는 고고학적 추정 사이의 상당한 간극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실종된 사실들을 종합하면, 성서가 그리는 요시야는 순수한 신앙의 화신이라기보다 아시리아 붕괴라는 지정학적 기회를 포착해 재통일과 영토 확장을 도모한 정치가에 가까우며, 그의 개혁이라는 사건 자체도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채 훗날 유수 공동체의 생존 신학이 투사된 결과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